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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저 푸른 초원 위의 집은 그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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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에 이민을 온 뒤로 한동안 녹색의 꿈을 꿨다. 서울에서는 볼 수 없던 녹색의 세상이 펼쳐졌다. 끝없이 펼쳐진 녹색 평원을 바라보는 것은 새로운 세상을 보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녹색 평원과 파란 하늘의 만남은 어느 화가가 그렸던 그림 속의 풍경이었다. 그 풍경 속으로 달리는 자동차도 그림이었고, 녹색 융단 위에 한가롭게 풀을 뜯던 송아지와 양들도 다 그림이었다. 갤러리 벽에 걸렸던 아름다운 회화를 직접 바라보면서 그 세상에 온 것처럼 한동안 꿈을 꿨다.

 

비슷한 시기에 이민을 온 한 지인이 바닷가를 끼고 있는 아름다운 곳에 농장주택을 사들였다. 오클랜드에서 서쪽으로 한 시간을 달린 바닷가였다. 서울에서 아파트를 처분하고 여생을 그림처럼 살고 싶다는 그는 한동안 꿈과 같은 세월을 보냈다. 덕분에 그림 같은 집에 여러 번 놀러 갔다. 갈 때마다 꿈을 이룬 그가 부러웠다. 정원에는 조그만 텃밭도 있었다. 멀리 바다가 보였고, 발코니 한 켠에는 천체 망원경도 있었다. 밤이 되면 별나라 이야기를 신기하게 듣곤 했다. 와인 셀러에서 와인을 골라와서는 해박한 뉴질랜드 와인 상식을 풀어놓고, 크리스탈 와인 글라스로 포도주를 즐겼다. 여러 개의 방이 있어 여러 명의 게스트가 와도 잠자리는 부족하지 않았다.

 

거실에는 벽난로, 그 한 켠에는 가라오케가 있었는데 저녁 술자리 끝에는 반드시 노래자랑이 벌어졌다. 흘러간 가요를 먼동이 틀 때까지, 그리고 목소리가 쉴 때까지 불렀다. 그 같은 농장주택의 술판은 얼마 후 시들해졌다. 농장주택에서 마시는 와인보다 허름한 선술집 막걸리가 더 그리웠다. 밤하늘의 별자리를 바라보고, 해지는 노을 쳐다보는 일이 일상처럼 되었을 때 '처음처럼'이라는 감동은 점점 멀어져 갔다.

 

농장주택의 저녁파티가 잊혀져 갈 무렵 그가 농장주택을 내놓고 오클랜드 시티 한 아파트로 이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동안 가보지 못한 바닷가 농장주택이 아른거렸다. 한국에서 씨를 가져와 심었다는 분꽃과 코스모스가 다시 보고 싶어졌다. 시내 아파트로 이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한동안 연락이 없던 그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 드디어 왔구나'하는 탄식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흘러간 가요를 목이 쉬도록 불렀던 것은 외로움 때문이었다고 흐느꼈다. 농장주택에서 부부가 그렇게 마이크를 잡고 밤을 새웠다고 했다. 그의 어린 아들이 어느덧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부부가 농장주택에서 남은 세월을 보내는 것은 외로움의 무게만을 켜켜이 더하는 것이었다. 여름철 물차를 불러야만 하고, 그 넓은 잔디밭을 수시로 깎아야만 하는 노동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해마다 수천 달러의 레이트(주택보유세금)를 부담해야만 하고, 먹는 것보다 더 무거운 세금 앞에서 평안한 노후생활의 꿈에 물음표가 찍혔다. 무엇보다 하나 둘씩 떠나가는 친한 사람들 앞에서 가라오케 파티도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했다. 헤어질 때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은 결코 그림이 아니었다"는 말을 남겼다. 얼마 후 서울에서 카톡 문자를 받았다. 무슨 대학교 평생교육원에 부부가 함께 다니고 있단다. 부인은 꽃꽂이 코스, 그리고 자신은 아코디언 연주 코스를 등록했단다. <소니 리 sonielee0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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