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본문시작

영국의 식민지화 확산 및 신 유럽 주의의 결과 (2)

by 굿데이 posted Apr 08, 200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첨부 수정 삭제
-양모 산업과 골드러시-

GOLD.JPG

지난 호에서 살펴보았듯, 뉴질랜드로 이주한 많은 유럽인들은 이곳을 그들이 살고 있었던 유럽 그대로 재현하고 그들의 식생활 및 생계수단도 이전과 같이 누리고자 여러 종류의 동.식물을 유입했다. 이번 호에는 그 중 하나인 축산업과 광업, 즉 골드 러시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먼저 유럽인들은 남섬의 드넓은 광야를 일구고 숲을 태운 후 영국 잔디를 심어 초원 지대로 개간했다. 북섬에서도 빽빽한 나무들을 벌목한 후 그 숲을 태우고 양들을 치기 위한 초원을 만들어 나갔다. 초기 식민지화 시기에 목장을 운영하는데 양은 가장 인기있는 동물이었다. 양모는 쉽게 운송.수출 될 수 있는 품목이었으며 양고기는 아직 냉장고가 없었어도 저장하지 않고도 늘 먹을 수 있는 고기가 되었다. 또한 한 마리의 소가 먹는 풀의 양으로 8~10의 양을 먹일 수 있었다. 실제로 1858년 그 당시 인구가 115,000을 겨우 넘어갔던 시기에 양의 수는 150만 마리였다. 그 후 1878년까지 양의 수는 1300만 마리로 증가했으나 이에 비해 소의 숫자는 같은 기간 1400마리에서 5800마리로 증가했을 뿐이다.

양모 산업 번성과 아울러 전 국토에 걸친 광물질 탐사가 시작되었다. 초원 지대를 만들기 위해 드넓은 숲을 계속 태워버릴 수는 없었기에 이 땅의 지하 매장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Hochstetter같은 과학자들은 뉴질랜드의 지형과 광물질의 연관관계를 연구 발표하였으며 특히 코로만델 반도, 남섬의 넬슨 지역 및 서부 해안과 오타고 지역에 금이 존재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실제로 1842년 코로만델에 정박했던 고래 사냥꾼들에 의해 금이 발견되었었으며 그 후 10년 후 목재 거상 Charles Ring이 코로만델 항구 뒷편 강둑에서 벌목한 목재들 속에 금이 박혀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로써 최초의 골드러시는 코로만델 마을과 코르빌케이프  및 머큐리 만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강물에 침전되어 있던 금의 양도 적었고 금을 채취할 수 있는 지역으로 접근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웠다. 강줄기를 따라 거대한 숲과 덤불을 제거하는 데 그 비용과 기간이 너무 많이 소요되어 결국 코로만델에서의 골드러시는 1년을 넘기지 못하였으며 금 채취자들은 다른 지역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1857년 남섬의 넬슨 근처 콜링우드와 아오레레에서 금이 발견되었으나 본격적인 골드러시는 오타고에서 시작되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와 빅토리아 골드필드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타스마니아 출신 Gabriel Read가 1861년 5월 Tuapeka 지역에서 사금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발견 당시의 사금을 ‘밤하늘에 빛나는 오리온처럼 캄캄한 밀림 속에서 금이 반짝이고 있었다’라고 했다. 한 달도 안되 이 소문은 퍼져 나갔고 전 세계에서 사금 채취자들이 아직도 Gabriel 계곡이라고 알려진 이 곳으로 몰려들었다. 오타고를 중심으로 계속 금이 발견되자 오타고는 몰려드는 사금 채취자들로 인해 거대한 도시로 형성되었고 최초로 금을 발견한 Gabriel Read는 시 당국으로부터 오타고 시에 많은 사람들을 유입시키고 그에 따른 발전에 대한 공헌으로 500파운드의 상금까지 받게 되었다.

사금과 금광이 공존했던 서부해안을 따라서도 1860년대 중반부터 약 10년간 골드러시가 이어졌다. 많은 상인들과 출판업자들, 매춘업자들로 이 지역은 그 당시 가장 번성하고 바쁜 지역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코로만델 테임즈 지역을 중심으로 다시 북쪽에서도 골드러시가 형성되었다. 일요일만 빼고 전체 지역이 채광을 하기 위한 폭발음 및 많은 사람들로 인해 늘 복잡하고 바쁘고 시끄러웠다고 한다. 일요일이 되면 사람들은 갑작스런 정적에 적응이 안되서 오히려 휴식에 지장을 받았다고 하니 그 당시의 테임즈를 상상해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금 때문에 몰려들었었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코로만델 남부 Waihi의 Martha 탄광에서도 1879년부터 1952년까지 40억 달러어치의 금을 생산해 냈었다.

노다지 행열은 1870대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했으나 남섬의 오타고 및 서부 해안지역에서는 꾸준했다고 한다.

한편 요즘 말로 사금 채취가 대박을 터뜨리는 바람에 전례없는 도시 번영과 이민이 이뤄졌다. 1858년 1,700명에 불과했던 더니든 인구는 1874년 즉 16년 만에 18,500으로 늘어났으며 이는 이 당시 뉴질랜드 최대 도시 오클랜드를 넘어선 것이다. 골드 러시 덕분에 1861년부터 1864년 사이 전 국토의 인구 수는 마오리들을 제외하고 98,000에서 171,000으로 증가했으며 1874년에는 255,000으로 증가되었다.

또한 골드러시로 인해 이전에 뉴질랜드에서는 볼 수 없었던 국적의 이민자들도 생겨났었는데 그 한 예가 중국인들이다. 1874년 인구 센서스에 의하면 Westland 인구의 6.06%, Otago 인구의 4.19%가 중국인들로 그 당시 이 두 곳을 제외한 뉴질랜드 그 어디에서도 중국인들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금을 따라 많은 아일랜드 인들도 뉴질랜드로 왔는데 Westland 인구의 18.95%까지를 차지하면서 독립적으로 아일랜드 사회를 이뤄나갔다. 자연스레 아일랜드 목사들과 주교들이 들어와 자기들 식의 예배와 미사를 집전하다가 결국에는 전국적으로 프랑스식 캐돌릭을 아일랜드 식 캐돌릭으로 바꿔버렸다.

1860년대가 끝나갈 무렵, 금으로 인한 국가 수익은 그 이전까지 국가 최대 수출품목이던 양모로 인한 수익의 2배가 넘었다. 금은 뉴질랜드 미래에 영원히 풍요로움을 가져다 줄 것으로 여겨졌고 실제로 한동안은 그랬었다. 그러나 1870년대를 거치면서 같은 시기에 일어났던 New Zealand War (Land War)로 인해 골드러시는 사그라들게 되었다.

?

  1. 영국의 식민지화 확산 및 신 유럽 주의의 결과 (2)

    -양모 산업과 골드러시- 지난 호에서 살펴보았듯, 뉴질랜드로 이주한 많은 유럽인들은 이곳을 그들이 살고 있었던 유럽 그대로 재현하고 그들의 식생활 및 생계수단도 이전과 같이 누리고자 여러 종류의 동.식물을 유입했다. 이번 호에는 그 중 하나인 축산업...
    Reply0 file
    Read More
  2. 영국의 식민지화 확산 및 신유럽 주의의 결과 (1)

    1840년 와이탕이 조약 이후 영국의 뉴질랜드 식민지화는 더욱 노골적이었으며 그 속도 또한 빨라졌다. 토지에 대한 마오리들과의 분쟁이 끊임없이 이어졌었으나 한 편으로 이미 뉴질랜드에 대한 식민지화는 마오리들에 대한 배려 없이 여러 방면에서 진행되어...
    Reply0 file
    Read More
  3. THE PROPHETIC MOVEMENTS

    뉴질랜드 Land War가 끝나면서 파케하들의 마오리 부족들에 대한 토지 몰수는 더욱 심해졌다. Waikato 지역에서는 1,202,172 에이커, Taranaki 지역에서는 1,275,000에이커, Tauranga-Opotiki 지역에서 738,000 에이커를 몰수하자 영국 정부에서 조차도 마오...
    Reply0 file
    Read More
  4. THE NEW ZEALAND WARS

    새로운 총독 Gore Brown은 마오리 부족의 왕 체제에 대해 대단히 적대적이었으며 이는 영국 여왕의 통치권에 대한 도전이라고 간주했다. 1859년 당시 북섬의 총 2천 6백만 에이커 중 7백만 에이커만이 파케하들에게 속해 있었는데 그는 마오리 부족을 협박하...
    Reply0 file
    Read More
  5. 토지 분쟁과 마오리 NATIONALISM

    토지 분쟁과 마오리 NATIONALISM NZ Comapny를 통해 이주자들이 땅을 차지하기위해 물밀 듯 몰려오고 영국 정부는 그 통치권을 휘두르기 시작하자 와이탕이 조약에 대한 영국 정부의 저의가 실제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에 대한 마오리의 반응은 Maori Nationa...
    Reply0 file
    Read More
  6. 와이탕이 조약, 그 이 후

    와이탕이 조약, 그 이 후 와이탕이 조약 서명 이후 그리 오래지 않아 유럽 정착민들과 마오리 사이에 많은 문제들이 뉴질랜드 전역에 걸쳐 발생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결국 1860년대의 Land War로 이어지게 되었다. 1843년 남섬 Wairau계곡의 거대한 토지를 놓...
    Reply0 file
    Read More
  7. Waitiangi 조약(2)

    Waitiangi 조약 드디어 1840년 2월 5일, 후에 Treaty House로 알려진 Busby의 집 마당 뜰에서 회합이 이루어 졌다. 날씨는 매우 좋았으며 수많은 마오리 카누들이 각 부족의 족장들과 그 일행들을 태우고 해안으로 속속 도착했다. 유럽 선박들도 이날을 축하하...
    Reply0 file
    Read More
  8. Waitangi 조약(1)

    배경 1770년 제임스 쿡 선장이 뉴질랜드 섬을 영국의 땅으로 선포한 이후 약 50년이 지나도록 뉴질랜드를 영국에 공식적으로 속하게 하거나 영국 정착민들을 위한 조치가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쿡 선장 이후 뉴질랜드를 방문했던 물개 및 고래 사냥꾼들 및 선...
    Reply0 file
    Read More
  9. 유럽인들의 정착 (2)

    <이민 선에서의 생활> New Zealand Company는 종교심이 강하고 가난하며 가족이면 더욱 좋고 근면한 사람들을 선정해서 뉴질랜드로 보냈다. 이렇게 선정된 이민자들의 고된 여정은 이민 선에 승선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영국에서부터 뉴질랜드까지는 약 4개월...
    Reply0 file
    Read More
  10. 유럽인들의 정착(1)

    James Cook 선장의 뉴질랜드에 대한 보고서가 읽혀지면서 갑자기 뉴질랜드는 유럽에서 큰 뉴스 화제가 되었다. 그는 뉴질랜드를 새로운 이주자들의 행복한 삶이 보장되는 약속의 땅으로, 마오리 사람들을 강하고, 활동적이며, 용감하고 에술적이며 호전적인 ...
    Reply0 file
    Read More
  11. 초기 유럽과의 교역 및 그 영향

    James Cook 선장이 1770년 뉴질랜드를 다시 방문하여 마오리들과 의복, 못 등을 포함하는 유럽의 물건들을 식량 및 마오리식 망토, 조각품, 그린스톤으로 된 무기나 장식품 등과 같은 귀한 진품들로 교환함으로써 교역을 시작한 이 후 1840년 와이탕이 조약이...
    Reply0 file
    Read More
  12. 초기 유럽인들의 정착과 마오리

    쿡 선장의 뉴질랜드 발견 후 선교사들은 마오리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기위해 뉴질랜드로 오기 시작했다. 최초의 선교사는 영국 교회 연합 소속의 ‘Samuel Marsden’이었다. 그는 마오리들을 이미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문명화되기에 충분한 ‘고귀한 민족’으로 ...
    Reply0 file
    Read More
  13. 유럽과의 접촉

    1)아벨 타즈만 폴리네시안들이 뉴질랜드로 이주하여 정착한 이후 수 세기동안 뉴질랜드는 세계 역사 속에 미지의 땅이었다. 힌두교, 불교 및 기독교가 북으로는 유럽으로부터, 인도, 중국 및 인도네시아를 휩쓸고 지나갈 때도 뉴질랜드에서는 폴리네시안들이 ...
    Reply0 file
    Read More
  14. 쿠페 후손들의 이주

    쿠페와 그 일행들은 아오테이로아의 남. 북섬을 일주하는 동안 많은 모험을 하면서 이 땅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을 몇 가지 발견하였었다. 그 중 남섬의 Arahura에서의 푸나무 (Pounamu: greenstone)의 발견과 Wairere 근처에서 날지 못하는 거대한 새, 모아 (Mo...
    Reply0 file
    Read More
  15. 멀고 먼 오세아니아를 향하여

    뉴질랜드의 역사와 문화는 기존의 마오리 역사와 문화에 유럽의 역사와 문화가 합류되어 절묘한 조화를 이룬 것으로 말할 수 있답니다. 이에 뉴질랜드 역사를 알고자 할 때는 초기 마오리의 이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겠지요? 그럼 초기 마오리들...
    Reply0 file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Nex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