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분쟁과 마오리 NATIONALISM
지난 호에 이미 상세히 설명하였듯 최초의 영국 정부에 대한 도전은 1843년 Nelson 근처 Wairau에서 발생하였다. NZ Company의 Te Rauparah의 땅에 대한 토목 공사에 대해 이 부족들이 무장 공격을 하였으며 Captain Arthur Wakefield와 이 지역 행정 각료는 Te Rauparah에게 무력으로 대항했으나 오히려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Maori 땅이 그저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Pakeha에게 알려주는 신호탄이 되었다.
두번째 중요한 사건은 북쪽의 Hone Heke가 1844년 영국 국기 게양대를 3회에 걸쳐 토막내버린 사건이다. Heke는 와이탕이 조약 이전에 누렸던 지역의 번영이 자신이 최초로 서명한 그 조약 이후 사라져가는 것에 대해 분노를 품게 되었다. 조약에 의해 모든 토지 거래는 정부에 의해 이뤄져야 했는데 자금 부족으로 이 지역의 토지 거래가 말라버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토지 거래 1에이커 당 부과시킨 10실링의 세금도 너무 컸었다. 또한 무기 거래의 30%, 포도주 거래의 20% 및 1파운드의 담배에 대해 1 실링을 부과시킨 높은 관세는 베이 오브 아일랜드로 입항하던 교역선들의 발길을 끊게 만들었으며 이는 이 지역의 퇴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분노한 Hone Heke의 저의를 가벼이 여긴 이 당시 총독 Fitzroy는 군대를 보내 전쟁을 일으켰으나 오히려 107명의 군인이 죽고 본인은 경질되었다.
영국은 식민지 통치에 아주 유능한 George Grey를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하고 Grey는 1846년 1월 Heke와의 협상을 통해 전쟁을 종료시켰다.
대충 요약해서 살펴본 위의 두 사건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명료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1. 마오리들은 땅에 대한 소유욕에 불타는 유럽 이민자들로 이 사회가 움직여가고 있다는 사실을 직면해야 했으며 특히 북섬에서는 마오리의 자유로운 통치권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과 영국 정부가 이 땅에 대한 새로운 힘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2. Wairau 지역에서의 대패로 인해 Wellington , New Plymouth 및 Nelson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Pakeha들은 정부의 군대가 여러 곳에 동시에 파병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있었기에 불안해 하기 시작했다.
3. 이주 정착민들은 땅을 원했으나 거저 가져가라고 놓여있는 땅은 거기 없었다.
Grey 총독은 Te Rauparaha를 체포해서 재판 없이 감금할 것과 계엄령을 선포 하에 Hutt Valley내의 마오리 땅에 NZ Company를 통해 이주한 이민자들을 정착시킴으로서 여왕의 통치권을 확립하고자 했다.
Maori의 저항을 해결하기위해 Grey 총독은 부족장들의 환심을 사는 방법도 택했다. 그는 Te Heuheu, Te Wherowhero와 같은 전설적인 부족장들을 초대해서 극진히 대접하면서 영국 정부가 이 땅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마오리 부족들의 명예심과 전통을 깊이 존중해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또한 이 때 나누어준 보상금-실제로는 돈이 아닌 여러 가지 생활 필수품들-으로 인해 우리는 이 협상을 'Flour and Sugar Policy'라고 말한다. 한편 이민자들은 땅을 원했다. Grey 총독은 남섬, Wairarapa, Manawatu 및 Auckland 내의 거대한 땅을 사서 이 이민자들의 소원을 들어줄 만큼의 충분한 돈이 있는 재력가였다. 그러나 그에게 땅 값이라는 것은 단지 이름뿐이었다. 하여튼 땅의 소유로 인해 Pakeha의 통치권은 이 땅 곳곳에서 자리잡게 되었다.
독재자였던 Grey는 NZ Constitution Act 1852에 따라 마오리들을 보호해야 하는 정부의 방침을 무시해버렸다. 개인 토지 거래 자격을 인정하고 부족 소유의 땅을 개인적인 도움을 얻어 취하기도 하고 국회에서 마오리를 교묘히 축출하기도 했다.
거대한 땅의 소유와 끝도 없어보이는 이민자들의 유입이 결부된 Pakeha의 정치적 지배력은 마오리들의 새로운 반응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새로운 통치력에 대해 마오리 부족 간에 Kotahitanga(=Unification) 사상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영국의 힘이 여왕을 중심으로 하는 Unification의 힘이라고 믿으면서 자신들도 Pakeha 세력과 대항하려면 Unification이 필요하다고 여긴 것이다. Te Whishi와 Te Rauparaha는 1853년 이 생각을 최초로 진척시켯으며 이것이 Maori Nationalism의 창시가 되었다.
Kotahitanga, 땅의 반환 및 Maori King 선출에 대한 문제들을 놓고 부족간의 회합이 연일 이어졌다. 1858년 Waikato 지역의 위대한 추장 Te Wherowhero가 최초의 마오리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자신들 고유의 국기를 선정하고, 의회, 헌법, 행정, 치안을 확립했다. 그러나 왕을 세운 가장 주된 이유는 마오리 땅 전역에 걸친 자신들의 Mana Whnua(통치권)을 되찾는 것이었다.
당연히 영국 정부 측에서는 마오리 부족들의 이러한 움직임을 인정하려 하지도 않았었고 이로 인해 뉴질랜드 국토가 커다란 충돌에 휩싸이게 된다. 이것이 Pakeha측시각으로는 New Zealand War라고 부르고 Maori측 시각에서는 Land War라고 부르는 1860년 대의 내전으로 다음 호에서 보다 상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필자: 김희연 오클랜드박물관 가이드]

NZ Comapny를 통해 이주자들이 땅을 차지하기위해 물밀 듯 몰려오고 영국 정부는 그 통치권을 휘두르기 시작하자 와이탕이 조약에 대한 영국 정부의 저의가 실제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에 대한 마오리의 반응은 Maori Nationalism으로 이어지게 된다.
지난 호에 이미 상세히 설명하였듯 최초의 영국 정부에 대한 도전은 1843년 Nelson 근처 Wairau에서 발생하였다. NZ Company의 Te Rauparah의 땅에 대한 토목 공사에 대해 이 부족들이 무장 공격을 하였으며 Captain Arthur Wakefield와 이 지역 행정 각료는 Te Rauparah에게 무력으로 대항했으나 오히려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Maori 땅이 그저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Pakeha에게 알려주는 신호탄이 되었다.
두번째 중요한 사건은 북쪽의 Hone Heke가 1844년 영국 국기 게양대를 3회에 걸쳐 토막내버린 사건이다. Heke는 와이탕이 조약 이전에 누렸던 지역의 번영이 자신이 최초로 서명한 그 조약 이후 사라져가는 것에 대해 분노를 품게 되었다. 조약에 의해 모든 토지 거래는 정부에 의해 이뤄져야 했는데 자금 부족으로 이 지역의 토지 거래가 말라버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토지 거래 1에이커 당 부과시킨 10실링의 세금도 너무 컸었다. 또한 무기 거래의 30%, 포도주 거래의 20% 및 1파운드의 담배에 대해 1 실링을 부과시킨 높은 관세는 베이 오브 아일랜드로 입항하던 교역선들의 발길을 끊게 만들었으며 이는 이 지역의 퇴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분노한 Hone Heke의 저의를 가벼이 여긴 이 당시 총독 Fitzroy는 군대를 보내 전쟁을 일으켰으나 오히려 107명의 군인이 죽고 본인은 경질되었다.
영국은 식민지 통치에 아주 유능한 George Grey를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하고 Grey는 1846년 1월 Heke와의 협상을 통해 전쟁을 종료시켰다.
대충 요약해서 살펴본 위의 두 사건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명료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1. 마오리들은 땅에 대한 소유욕에 불타는 유럽 이민자들로 이 사회가 움직여가고 있다는 사실을 직면해야 했으며 특히 북섬에서는 마오리의 자유로운 통치권을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과 영국 정부가 이 땅에 대한 새로운 힘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2. Wairau 지역에서의 대패로 인해 Wellington , New Plymouth 및 Nelson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Pakeha들은 정부의 군대가 여러 곳에 동시에 파병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있었기에 불안해 하기 시작했다.
3. 이주 정착민들은 땅을 원했으나 거저 가져가라고 놓여있는 땅은 거기 없었다.
Grey 총독은 Te Rauparaha를 체포해서 재판 없이 감금할 것과 계엄령을 선포 하에 Hutt Valley내의 마오리 땅에 NZ Company를 통해 이주한 이민자들을 정착시킴으로서 여왕의 통치권을 확립하고자 했다.
Maori의 저항을 해결하기위해 Grey 총독은 부족장들의 환심을 사는 방법도 택했다. 그는 Te Heuheu, Te Wherowhero와 같은 전설적인 부족장들을 초대해서 극진히 대접하면서 영국 정부가 이 땅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마오리 부족들의 명예심과 전통을 깊이 존중해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또한 이 때 나누어준 보상금-실제로는 돈이 아닌 여러 가지 생활 필수품들-으로 인해 우리는 이 협상을 'Flour and Sugar Policy'라고 말한다. 한편 이민자들은 땅을 원했다. Grey 총독은 남섬, Wairarapa, Manawatu 및 Auckland 내의 거대한 땅을 사서 이 이민자들의 소원을 들어줄 만큼의 충분한 돈이 있는 재력가였다. 그러나 그에게 땅 값이라는 것은 단지 이름뿐이었다. 하여튼 땅의 소유로 인해 Pakeha의 통치권은 이 땅 곳곳에서 자리잡게 되었다.
독재자였던 Grey는 NZ Constitution Act 1852에 따라 마오리들을 보호해야 하는 정부의 방침을 무시해버렸다. 개인 토지 거래 자격을 인정하고 부족 소유의 땅을 개인적인 도움을 얻어 취하기도 하고 국회에서 마오리를 교묘히 축출하기도 했다.
거대한 땅의 소유와 끝도 없어보이는 이민자들의 유입이 결부된 Pakeha의 정치적 지배력은 마오리들의 새로운 반응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새로운 통치력에 대해 마오리 부족 간에 Kotahitanga(=Unification) 사상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영국의 힘이 여왕을 중심으로 하는 Unification의 힘이라고 믿으면서 자신들도 Pakeha 세력과 대항하려면 Unification이 필요하다고 여긴 것이다. Te Whishi와 Te Rauparaha는 1853년 이 생각을 최초로 진척시켯으며 이것이 Maori Nationalism의 창시가 되었다.
Kotahitanga, 땅의 반환 및 Maori King 선출에 대한 문제들을 놓고 부족간의 회합이 연일 이어졌다. 1858년 Waikato 지역의 위대한 추장 Te Wherowhero가 최초의 마오리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자신들 고유의 국기를 선정하고, 의회, 헌법, 행정, 치안을 확립했다. 그러나 왕을 세운 가장 주된 이유는 마오리 땅 전역에 걸친 자신들의 Mana Whnua(통치권)을 되찾는 것이었다.
당연히 영국 정부 측에서는 마오리 부족들의 이러한 움직임을 인정하려 하지도 않았었고 이로 인해 뉴질랜드 국토가 커다란 충돌에 휩싸이게 된다. 이것이 Pakeha측시각으로는 New Zealand War라고 부르고 Maori측 시각에서는 Land War라고 부르는 1860년 대의 내전으로 다음 호에서 보다 상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필자: 김희연 오클랜드박물관 가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