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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탕이 조약, 그 이 후

by 굿데이 posted Apr 08,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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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탕이 조약, 그 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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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탕이 조약 서명 이후 그리 오래지 않아 유럽 정착민들과 마오리 사이에 많은 문제들이 뉴질랜드 전역에 걸쳐 발생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결국 1860년대의 Land War로 이어지게 되었다.


1843년 남섬 Wairau계곡의 거대한 토지를 놓고 New Zealand Company 이주 공사를 통해 정착한 이민자들과 막강한 힘을 갖고있던 두 부족장 Te Rauparaha와 Te Rangihaeata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이주 공사는 정착민들을 위해 그 땅을 이미 샀다고 주장했으나 이 족장들은 그들이 이 토지의 참 주인이며 토지의 어느 부분도 팔지않았다고 했다.

토목 기사들이 토지를 구획하는 작업을 할 때 Te Rauparaha를 따르는 마오리들은 말뚝을 뽑고 그들의 집을 불태웠다. 유럽 정착민들은 Arthur Wakefield  선장의 명령에 따라 Te Rauparah를 체포하기위해 무장 민간인들을 보냈다.  이 전투에서 Te Rangihaeata의 아내  Te Rongo가 총격으로 숨졌으나 한편 무장 민간인들은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Te Rangihaeata와 그의 부하들은 Te Rongo의 죽음을 기리면서 이 유럽인들을 다 살해했다.  이민자들은 정부에 도움을 청했으나 Hobson 총독의 뒤를 이은 Fitzroy는 이 사건이 단순히 이민자들의 어리석은 욕심으로 인해 발생했다고 여겼으며 이 사건에 연루된 마오리 부족들과 일시적인 평화를 맺는 것으로 이 사건을 마무리했다.

Wellington 지역에서도 1846년 문제가 발생했다. Te Rangihaeata 족장을 따르는 무리들이 Hutt 게곡의 수비대를 공격하여 대원들을 다 살해했다. Pakeha보다는 Maori들에게 더 관대하게 일을 처리하던 Fitzroy의 뒤를 이어 1845년에 총독이 된 George Grey는 즉각 군대를 보내 Te Rangihaeata무리들을 이 지역에서 내몰고 Wellington 지역을 차지하였다.

와이탕이 조약이 처음으로 맺어진 Bay of  Island에서도 분쟁이 발생했다. 마오리 부족장 들 중 가장 먼저 조약에 서명한 Hone Heke는 1840년 와이탕이 조약이 이뤄진 이후 Bay of Island에서 발생되고있는 변화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가장 큰 실망감은 Hobson 총독이 모든 행정부와 관료들을 이끌고 1841년 수도를 Auckland로 옮기면서 갖게 되었다.  더구나 정부에 내야하는 관세가 높아지자 고래 사냥 배와 교역선이 이 항구에 거의 들어오질 않게 되었고 이에 따라 토지 거래와 마오리 교역품을의 수요가 급작스럽게 감소되었다.  이제 Bay of Island 는 더 이상 활기찬 뉴질랜드 제 일의 유럽 정착민 지역이 아닌 것이다.

영국 정부에 실망하고 분노를 품게 된 Hone Heke 와 그 부족들은 초기 수도였던 Russell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게양되어 있던 또한 뉴질랜드에 대한 영국 통치권의 상징인 영국 국기를 세 차례에 걸쳐 찢어 버렸다. 영국 정부는 이 국기를 보호하기위해 게양대에 수비대를 설치하였으나 1845년 3월 Heke와 그 일행들은 이 수비대를 공격하고 군인들을 다 살해한 후 Russell로 내려가 도시를 불태워 버렸다.

Fitzroy 총독은 즉각 군대를 Omapere  호수 근처 마오리 요새에 보냈으나 공격은 실패하였고 긴 전투 후에 따른 영국측의 손실이 너무나 컸었다.  이 사건으로 Fitzroy는 경질되고 George Grey가 1845년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수 차례에 걸친 공격을 감행했으나 결국  Hone Heke와 평화 협정을 맺을 수 밖에 없었으며 이 후로 Hone Heke의 부족으로부터 토지를 몰수하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와이탕이 조약에 대한 결론.
와이탕이 조약은 유럽 식민 세력과 그 토착민들과의 관계에서 역사 상 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한 조약이다.  비록 이 조약문의 조항들이 수십 페이지에 걸친 국제 조약문들과 같지 않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그 원칙과 의도는 매우 명확하다고 볼 수 있다.

얼마동안 무질서하고 통제되지않은 토지 거래를 방지하고 Pakeha와 Maori 양 측을 보호하는데 이 조약은 효력이 있었다. 사실 이 당시 유럽인들은 마오리들의 협조 하에 뉴질랜드에 원만히 정착할 수 있었다.  유럽 이주자들의 취약성은 Wairau 지역과 Bay of Island에서 발생한 사건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유럽 이주자들의 토지 소유에 대한 욕망은 갈수록 커졌고 이들은 보다 많은 토지를 구매하라고 정부를 압박했다. 정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오리들의 권리와 이익에 상관없이 토지를 사들이거나 경우에 따라 몰수하기도 했었다. 이는 '영국의 여왕은 모든 마오리 부족들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권, 삼림권, 어업권을 보호한다. 그러나 모든 마오리 부족이 토지를 팔고자 할 때는 오직 여왕에게만 팔 수 있으며 여왕으로부터 임명된 중개상들과 부족간의 동의 가격으로 매매가 이뤄진다'는 와이탕이 조약 제2항에 위배되는 것이었으며 결국 영국 정부의 이러한 횡포와 유럽인들의 지나친 토지 소유욕은 1860대에 Land  War를 발생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와이탕이 조약 서명 이후 160여년이 지난 지금도 뉴질랜드 정부와 마오리들 사이에서는 특히 토지와 어업권에 대해 깊이 재 검토하고 있으며 그 와중에 각자의 이익과 권리를 놓고 많은 분쟁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이 분쟁들을 해결하기 위해 앞으로 갈 길이 멀어보이기는 하나 어찌되었든 와이탕이 조약이 맺어질 당시 이 조약은 Pakeha와 Maori 양측을 위해 공정하게 만들려고 노력하였던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필자: 김희연 오클랜드박물관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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