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1770년 제임스 쿡 선장이 뉴질랜드 섬을 영국의 땅으로 선포한 이후 약 50년이 지나도록 뉴질랜드를 영국에 공식적으로 속하게 하거나 영국 정착민들을 위한 조치가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쿡 선장 이후 뉴질랜드를 방문했던 물개 및 고래 사냥꾼들 및 선교사들, 교역업자들은 뉴질랜드에서 정착할 의도가 없었으므로 1830년 까지만 해도 약 300명의 유럽인들이 뉴질랜드에 살고 있었을 뿐이었고 마오리 부족들이 대부분의 이 땅을 이전과 같이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1830년 이후 유럽인들의 유입은 급속히 늘어 1840년 경 이미 약 2000명의 유럽인들이 이곳에서 정착하였고 그 대부분은 영국인 이민자들이었다. 여기에는 호주에서 건너온 범법자들 및 고래 사냥꾼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마오리들에게 좋지않은 영향도 많이 끼쳤었다. 법과 질서는 거의 없었고 마오리 문화와 정서를 이해하지 못한 유럽 정착민들과 마오리 부족 간의 지역 분쟁이 끊이지 않았었다.
이러한 상황들을 조정하고자 1833년 James Busby가 영국 정부에 의해 호주에서 뉴질랜드로 보내졌다. 그는 와이탕이에 정착하여 마오리와 유럽 정착민들 사이의 분쟁 및 마오리 부족간의 분쟁을 조정하였으며 훗날 와이탕이 조약을 체결하기위한 2가지 기초를 다져놓았다.
그 첫째는 1834년 자신의 집 뜰에서 25명의 마오리 부족장들을 집결시켜 뉴질랜드 국기를 선정한 것이었다. 지난 호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 국기를 게양한 배들은 호주 내 모든 항구를 출입할 때 세금을 내지않아도 되었었다. 두번째는 1835년 34명의 부족장들을 모아 '뉴질랜드 연합 부족 연방'을 결성하고 그 독립성을 선포한 것이었다. 영국 정부는 이 부족 연합의 독립성과 마오리 권익을 보호하는데 동의하고 이 선포를 받아들였다. 이 연방은 교역을 증대 시키고 법의 제정을 위해 매년 의회를 열기로 합의하였으나 부족간의 분쟁으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Busby의 노력으로 1839년에는 52개 부족들이 이 연방에 속하게 되었으며 이 또한 와이탕이 조약 체결 당시 마오리 부족들로부터의 협조를 받아내는데 큰 역할이 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 영국의 뉴질랜드 식민지화를 위협하는 외부 요소들이 있었는데 그 중 가장 큰 요소는 뉴질랜드를 차지하려는 프랑스와 미국의 접근 및 압력이었다. 많은 수의 미국 소속 고래선들이 매년 Bay of Islands에 정박하여 상업적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마오리와의 분쟁을 일으키고 있었고 프랑스에서는 1837년 Baron Charles de Thierry가 Hokianga (Waitangi에서 서쪽 반대편 지역)에 도착하여 자신을 뉴질랜드의 통치자로 선언하면서 뉴질랜드의 프랑스화에 주력하였고 같은 해 Pompalleir주교가 도착하여 카돌릭 선교를 시작하면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즉 Waitangi조약을 체결하기 전까지 영국 정부는 뉴질랜드에 대한 식민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있다.
한편 영국 정부는 무력으로 식민지를 통치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무력과 재력을 동원해야만 하고 또한 그에 따른 어려움을 이미 호주 식민지화를 통해 알고있었다. 이 당시 남태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의 수도 적었을 뿐더러 뉴질랜드 식민지화에 많은 수의 군대와 자금을 투입할 의지도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마오리의 호전성과 용감한 전사 정신 등에 대해 잘 알고 있던 터라 무력보다는 마오리 부족들의 이익과 권리 등을 보호해 줄 수 있는 협정서를 통해 뉴질랜드를 식민지화 하고자 했다.
이에 영국 정부는 William Hobson 을 뉴질랜드 총독으로 임명하였고 Hobson은 뉴질랜드 전역에 걸친 마오리 부족들로부터 영국 Victoria 여왕에게 통치권을 이양한다는 협정을 받아내기 위해 1840년 1월에 Bay of Islands에 도착하였다. 동시에 마오리들의 땅과 자원에 대한 정부 차원의 보호를 보장하면서 그들의 땅을 오직 영국 정부에만 매각할 수 있다는 동의를 받아내는 것 또한 그의 임무였다. 그 당시 영국은 뉴질랜드에서 진행되고 있던 무질서하고 통제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토지거래를 중지시키고 영국 정부를 통해서만 토지 거래가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을 선포, 실행하고자 했다.
Hobson은 뉴질랜드에 도착한 후 곧 이어 앞으로 뉴질랜드 내에서의 토지 거래는 새로운 정부에 의해서만 이뤄져야 하며 이전의 토지 거래는 그 공정성과 타당성 등이 검토된 후 인정될 수 있다고 선포하였다. 이미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던 선교사들과 같은 유럽 정착민들에게는 환영 받지 못했지만 이는 와이탕이 조약 체결의 사전 준비 과정이었다.
이 선포에 대한 영국 정부 의도는 토지 거래에서 생기는 이익과 뉴질랜드를 방문하는 모든 교역선들로부터 걷어들이는 세금으로 자금을 형성하고, 이로써 법과 질서를 집행할 수 있는 군대 또는 무장 경찰 등을 설립하여 영국 정부에서의 대량 자금, 인력 및 자원의 지원 없이 새로운 식민 정부를 수립하고 통치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뉴질랜드 총독 Hobson은 Busby의 비중 있는 조언에 따라 Waitangi 조약의 초안을 작성하였으며 Anglican 선교사였으며 마오리 언어와 그들의 정서를 잘 알고있던 Henry Williams와 그의 아들 Edward에 의해 조약문이 마오리 어로 번역되었다.
다음 호에는 Waitiangi 조약의 내용과 체결 당일의 모습, 그 후 뉴질랜드 전역에 걸친 서명 수령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다.
[필자: 김희연 오클랜드박물관 가이드]